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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나루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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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 형성의 배경

 

 

저네들은 우리나라를 합병하던 1910년의 50여 년 전부터 이미 치밀하게 계획하고 쳐들어올 침략을 획책하였다. 시간은 1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코하마 항에서 미국함정의 함포사격 2발로 촉발된 화친조약으로 일방적인 미국의 요구로 이루어진 조약이었다. 일 년 동안 교역을 한 결과, 일본의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본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 때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이란 사무라이가 2년간 숙고 끝에 일본의 장래에 대한 대안을 떠올렸다. 그의 구도는 성주를 중심으로 살아 온 지방분권체계 곧 다이묘〔大名〕들을 통합하여 일본의 힘을 중앙집권적인 천황제(天皇制)를 실시하고 힘을 길러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었다. 이와 동시에 폐번치현(廢藩置縣)이라는 극약처방이라는 안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금, 은이며 산물을 빼앗아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일본의 적자를 해결해보자는 구도였다. 정한론의 첫 과제로는 조선정복으로 자국의 적자를 메운다. 다음으로 만주정벌에서 이익을 얻고 마지막으로는 대만과 여송도(呂宋島, 필리핀)까지 정벌해서 대일본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도이니 말하자면 대동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꿈이었다. 실은 저들만의 잔치인 것을 누구나 잘 알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구의 열강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일본장래를 위한 교육의 공간을 세우고자 했다. 이어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은 1856년 쇼오까촌숙(松下村塾)이란 학교를 세워 어린 꿈나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요시다는, 당시 장군후계자 지명을 할 때, 지방의 다이묘들이 싫어하는 천황제를 추구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실권을 잡은 권력자의 눈에는 쇼인의 정책이 자신들의 전치적인 입지를 뒤흔드는 반동이니 눈에 가시일 수밖에. 학교는 사라졌고 스승이 사형 당하자 제자들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이와꾸라도무미는 가장 나이어린 17세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시켜 남모르게 스승의 주검을 파묻게 했다. 이어 제자들은 스승의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혈맹(血盟)을 하고 흩어진 뒤 일본 전역에 지하당을 조직하였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868년 1월 이와꾸라도무미 외 쇼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마침내 배추장사로 연명하던 황족 출신의 명치(明治)를 내세워 천황으로 삼고 왕정을 복고시켰다. 말하자면 다이묘 시대를 마감하였다. 근대 일본의 새로운 체제의 정권이요, 명치유신이었다. 그 다음해 1869년에 기또다카요시(木戸孝允)가 각료로 취임하자 각의(閣議)에서 정한론을 정식으로 통과시킴으로써 정한론은 공공연한 국책과제로 떠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예방하거나 문서를 보내기 위해서는 대마도주의 인장이 있어야 했다. 새로운 명치천황은 대마도주의 인장을 받기는커녕 오만불손한 내용을 보내 침략의 동기를 심었다. 하지만 병인양요(丙寅洋擾)를 해결한 대원군 정권은 강력한 쇄국으로 일본의 사신들은 그의 위세에 눌려 헛물만 켜고 돌아갔다. 이어 대일본제국 건설을 위해 구미시찰단을 결성하고 이와꾸라가 단장이 되어 1년 10개월간 서양열강들의 정세를 시찰한 결과, 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게 우선 과제임을 깨닫고 선내치후정한(先內治後征韓)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꿨다. 자국의 힘이 없으면 애써 한국을 정복하더라도 강대국에게 빼앗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명분이 분명한 정한을 하기위해 주도면밀한 책략을 짜기 시작했다. 마침내 1882년 3월 일본의 육군참모본부에 ‘조선국사편찬부’를 만들고 젊은 장교들에게 조선말과 조선 국사를 가르쳐 조선에서 자료 수집을 하도록 했다. 동시에 정한 과정에 용이하도록 그 방법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을 하도록 했다. 다음 해인 1883년 이등박문이 내각총리가 되었다. 제국대학을 세우고 1887년 제국대학 안에 사학과를 설치하고, 그 동안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자료와 조사결과 등을 모두 옮기도록 하였다. 

 

  한편, 당시 서양에선 실증주의(實證主義)에 의한 역사를 중시하고 있었다. 일본은 세계적인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불란서의 실증주의 철학자 랑케의 제자인 리스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과학적인 역사기록의 방법을 익혔다. 2년 동안 함께 연구를 한 리스는 일본이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날변조하는 일을 눈치 채고 이의를 제기하자 당국은 딴청을 부리고 사학과가 있음에도 국사학과를 다시 설치하여 그 동안 얻어진 자료와 연구물을 국사학과로 옮겼다. 바야흐로 일본은 1892년 패기에 찬 젊은 하야시곤스케(林權助) 교수를 불러들여 조선사(朝鮮史) 5권,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지은 만선사(滿鮮史)를 만들었다. 그 어느 고서에도 없는, 황당무계한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설(新羅征伐說)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이 때 만들어졌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가야까지도 모두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는 것은 일본의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고대말엽 혹은 10세기의 후지하라(藤原) 시대에 비할 만큼 스스로 발전할 힘도 없기에 자신들이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온 국민을 교화하였다. 이러한 역사날조를 하는 일본의 행위를 가장 먼저 눈치를 챈 이는 단재 신채호(申采浩)였다. 그는 1908년부터 한국의 역사를 조사하고 연구함으로써 대한매일신문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였다. 여기 독사(讀史)라 함은 역사책을 바르게 읽는다는 뜻이다. 1910년 합방 이후, 1915년에는 백암 박은식(朴殷植)이 ‘한국통사(韓國痛史)’를 발간함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제는 이에 대하여 1916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를 세우고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따른 ‘조선사(朝鮮史)’ 편집에 들어가게 된다. 한국의 역사서들은 모두 걷어 가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던 규장각(奎章閣)에는 한국 사람은 그 누구라도 볼 수 없게 했다. 열람이 가능한 것은 저네들이 엮은 조선사(朝鮮史) 37권 만뿐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날로 더해가는 조선민족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하여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를 엮기로 했다. 다시 이어서 어용 학술단체였던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를 조직하고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식민주의사관으로 저술한 ‘조선사(朝鮮史)’ 37권의 사서를 만들었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부터 1936까지 조선사(朝鮮史) 37권 조선사의 길잡이,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 3권,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21종을 상재했다. 그 가운데 37권의 조선사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가장 역점을 두어 편찬한 사서로 식민지정책에 유리한 것만 선택하여 부풀리고 불리한 것은 모두 빼 버렸다. 일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통치 25돌을 기념하는 대중용 해설서 ‘조선사의 길잡이’ 에 한국민족은 예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변함없는 사대적(事大的) 역사를 가졌으며 일제 통치 하에 처음으로 행복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통한의 세월이었다.

 

진달래 아린 꽃이 흙바람 속에,

한을 달래는 듯, 새봄을 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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